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체스카 도너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rancesca_Donner's_childhood.jpg|width=100%]]}}}|| || 어린 시절의 프란체스카. ||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행정구역)|수도]] 중 하나인 [[빈(오스트리아)|빈]] [[교외]]에 위치한 인처스도르프에서 유대교 가문의 아버지 루돌프 도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게르하르틀 사이에서 태어났다. 빈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0년에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였던 헬무트 뵈링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 당시 프란체스카와 어머니가 [[제네바]]의 한 호텔 카페에 들렸다가, 빈 테이블이 없어서 [[이승만]]과 합석하게 되었다. 훗날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이승만이 점잖아 보이는 노신사라서 합석했는데 내 딸과 결혼하게 될 줄 몰랐다."라고 회고했다. 둘의 나이차는 25세이다.]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31780&cid=46626&categoryId=46626|결혼했다.]] 프란체스카는 [[재혼]], 이승만은 [[중혼]][* 이승만과 첫 부인 박승선은 1891년 혼인했다.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201&docId=344334639&qb=7J207Iq566eMIOyhseuzt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030118|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20041#_DYAD|취재2]]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08180048#_DYAD|취재3]][[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mp.aspx?CNTN_CD=A0002736438|오마이뉴스]] [[https://m.kmib.co.kr/view_amp.asp?arcid=0924162948|국민일보]]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853857.html?_fr=gg|한겨레]]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1362619650808m1071&set_date=19650808&page_no=7|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http://mobile.busan.com/view/busan/view.php?code=19600920000036|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었다.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이승만과 결혼식(중혼)을 올렸고, 이승만 측의 소송으로 지방 재판 등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으며 어영부영 박승선의 호적이 말소된 사이 1950년 4월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를 했다. || [[파일:Syngman Rhee and Francesca Donner at port.jpg|width=100%]] || [[파일: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in Washington.jpg|width=100%]] || || 1935년 1월 23일, [[LA]]에 도착하여 [[하와이]]로 건너가려는 원양 정기선 마로로(S. S. Malolo) 호 옆에서 찍은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사진.[* 사진 : Keystone-France] || 1942년 2월 말,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 참석한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사진 : 마이런 데이비스(Myron Davis)] ||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왔고,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이 때 한국에서는 대통령 배우자가 외국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 사실 이는 외국에서도 흔히 하는 실수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잘못 알아듣고 "[[캥거루]] 있어요?"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고 영화 [[덤 앤 더머]]에서도 이를 소재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호주로 더 많이 부른다. 그래서 그나마 현대 [[한국인]]들은 잘 안 헷갈리는 편인데, [[외국인]]들은 지금도 헷갈려 한다. '''심지어 서양인조차도''' 헷갈려한다. 참고로 오스트리아의 음차는 오지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차는 호주로 완전히 다르다. 여담으로 주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과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 모두 종로 교보빌딩에 있다.]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 전투기 중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글로스터 미티어]]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들 불렀는데, 이를 혼동하여 대통령 배우자의 친정 국가에서 지원 보내줬다면서 고마워한 한국인들도 있었다.[* 참고로 프란체스카의 진짜 친정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오스트리아 병합|독일에 흡수]]되었다가 패전 후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연합군에 분할되어 군정을 받는 중]]이었다. 1955년에야 영세중립국이 되는 조건으로 독립을 되찾았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에는 군대 자체가 없었으며 연합군의 군정을 끝내고 주권을 회복하였던 1950년대 후반에는 2차대전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재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통령 배우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며 수발을 드는 등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와 속기 및 타자에 능숙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엔 대한민국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비서로서 외교 업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6.25 전쟁]] 기간에는 3개국 언어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사를 알려 국제 사회의 동정적 여론을 이끌어냈으며, 외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로 곳곳을 누비며 큰 역할을 해냈다.[* [[https://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SrcGBN=BK&photo_PhotoID=13&detl_PhotoDTL=10| 정부기록사진집: 피난지를 둘러보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 (1951년 6월 8일, 경남 거제)]] [[https://www.ehistory.go.kr/page/view/photo.jsp?photo_PhotoSrcGBN=BK&photo_PhotoID=13&detl_PhotoDTL=77&gbn=BK|한국전 참전 노르웨이 병원 관계자 격려 (1951년 6월 27일)]]] 또한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http://xn--zb0bnwy6egumoslu1g.com/bbs/board.php?bo_table=episode&wr_id=39| (출처) 이승만 기념관: 베일 속의 외교관 - 프란체스카 도너 리 (Francesca Donner Rhee)]]]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고령으로 접어들자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 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下野)한 후, 이승만을 따라 [[하와이]]로 갔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 사망 이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잠시 돌아갔다가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당시 언론보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가 정치적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망명 목적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했지만, 정작 이승만 전 대통령 내외는 국내의 여론을 감안해 요양과 휴양을 목적으로 한 달 정도를 [[하와이]]에서 지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 단기여정계획은 여론악화로 인한 정부의 귀국만류통보, 이 대통령의 투병과 임종, 프란체스카 여사 본인의 지병 악화 등의 사정이 생기며 수년의 해외체류로 바뀌었다. 여사의 영구 귀국은 [[육영수]] 여사의 권유와 지원으로 1970년 5월 16일에나 이루어졌다. 1960년 5월 29일에 출국한 이래 10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https://www.pa.go.kr/record/201311/index.html| (출처) 대통령기록관: 기록으로 본 프란체스카 여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C%98%81%EC%A3%BC%ED%95%98%EB%9F%AC%20%EA%B7%80%EA%B5%AD%20%ED%94%84%EB%9E%80%EC%B2%B4%EC%8A%A4%EC%B9%B4%20%EC%97%AC%EC%82%AC%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20-03-05%22%2C%22endDate%22%3A%221999-12-31%22%7D| 1970.05.16일자 신문 기사 (네이버 옛날신문): '영주하러 귀국, 프란체스카 여사']]] 한국에서는 이화장에서 그녀의 양자인 이인수 부부와 함께 거주했다.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면서 조용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B%AA%BB%EB%8B%A4%ED%95%9C%20%EB%82%B4%EC%A1%B0%20%EC%95%84%EC%89%AC%EC%9B%8C%ED%95%98%EB%8A%94%20%ED%94%84%EB%9E%80%EC%B2%B4%EC%8A%A4%EC%B9%B4%20%EC%97%AC%EC%82%AC.%20%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20-03-05%22%2C%22endDate%22%3A%221999-12-31%22%2C%22selofficeId%22%3A%2200020%22%7D| 동아일보 (1982.1.30.): 양말꿰매며 근검한 생활, 철저한 국산품 애호가. 못다한 내조 아쉬워하는 프란체스카 여사.]]], [[노태우]]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Keyword.naver#%7B%22mode%22%3A1%2C%22sort%22%3A0%2C%22trans%22%3A%221%22%2C%22pageSize%22%3A10%2C%22keyword%22%3A%22%EF%A4%B3(%EB%85%B8)%20%EB%8C%80%ED%86%B5%EB%A0%B9%2C%20%ED%94%84%EB%9E%80%EC%B2%B4%EC%8A%A4%EC%B9%B4%20%EF%A6%81%E5%8F%B2(%EC%97%AC%EC%82%AC)%20%EC%B4%88%EC%B2%AD%20%22%2C%22status%22%3A%22success%22%2C%22startIndex%22%3A1%2C%22page%22%3A1%2C%22startDate%22%3A%221920-03-05%22%2C%22endDate%22%3A%221999-12-31%22%2C%22selofficeId%22%3A%2200023%22%7D| 조선일보 (1989.6.16.): 盧(노) 대통령, 프란체스카 女史(여사) 초청]]] 한국 최초 [[퍼스트 레이디]]로서 국가 원로로 예우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관속에 태극기와 성경책 그리고 남북통일이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넣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다. SYNGMAN RHEE라는 금박의 이름이 박힌 영어 성경책이 발견되었을 때, 조혜자 여사가 그녀의 유언을 언급하는데 다음과 같다. "어머님은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달라. 그리고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달라.' 이렇게 무덤에 넣은 것 때문에 두 분이 날마다 기도하고 읽으셨던 성경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런데 영문 성경이 발견되었다니.. [[https://v.daum.net/v/20230322000152820|#]]]을 남기고 향년 91세를 일기로 이화장의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으며[*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14123|KBS 뉴스 영상 (1992.3.19.): 프란체스카 부인 사망]]], 1992년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https://news.kbs.co.kr/mobile/news/view.do?ncd=3714277|KBS 뉴스 영상 (1992.3.23.): 프란체스카 여사 영결식 가족장으로 거행]]],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합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